자료=OECD 과학기술통계, 글로벌 컨설팅 그룹(맥킨지 등) 보고서 및 CS Ranking 등을 토대로 본지 종합 분석
인공지능(AI) 경쟁력 논쟁은 늘 기술과 투자 규모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현장에서 부딪히는 현실은 다르다. GPU와 데이터는 돈으로 살 수 있지만, AI 인재는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국은 AI를 못하는 나라가 아니라, 핵심 인재를 축적하지 못하는 구조에 놓여 있다. 대학과 연구소에서 길러진 인재들은 해외로 향하고, 기업들은 인재 부족을 호소한다. 이에 한국 AI 산업의 성패를 가를 'AI 인재'의 현주소와 해법을 짚는다. - 편집자 주 -
1편에서 확인했듯 대한민국 AI 인재들은 높은 연봉에도 불구하고 '성장 기회'를 찾아 한국을 떠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성장 기회란 추상적인 비전이 아니라, 연구를 실제 기술과 시장으로 구현할 수 있는 인프라와 제도의 자유를 뜻한다.
본지 분석 결과, 한국 기업의 AI 연구개발(R&D) 환경은 여전히 제조업 중심 사고에 머물러 있으며, 글로벌 빅테크와의 자본·인프라 경쟁에서 이미 구조적인 열세에 놓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격차는 AI 인재들의 이직을 촉진하는 '5대 환경 변수'로 작동하고 있다.
# GPU 인프라 빈곤 지수…'총알 없는 전쟁터'
AI 연구에서 GPU(그래픽처리장치)는 가장 기본적인 생산 수단이다. 엔비디아 H200과 같은 최신 GPU 자원의 확보 여부와 개발자 1인당 할당량은 연구의 속도와 질을 좌우한다.
글로벌 AI 연구기관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미국 주요 빅테크 기업의 AI 연구팀은 개발자 1인당 다수의 GPU 클러스터에 사실상 제한 없이 접근할 수 있는 반면, 국내 대기업 AI 연구소는 이의 10분의 1 수준의 자원만 제한적으로 배정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GPU 빈곤'은 연구 속도의 치명적인 격차를 낳는다.
실리콘밸리에서는 평균 1~3일이면 모델 학습 결과를 도출하는 반면, 국내 연구소는 자원 배정 대기로 인해 7~10일이 소요된다.
최고 수준의 인재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지점이 바로 이 '속도 차이'다.
# AI R&D 투자 대비 상용화 비효율
한국 기업과 정부는 AI R&D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지만, 이 투자가 실제 시장 혁신으로 이어지는 비율은 낮다.
최근 5년간 주요국의 R&D 100억 원당 AI 상용 특허 등록 건수를 보면 미국은 45.2건, 중국은 38.5건인 반면, 한국은 15.7건에 그쳤다.
투입 대비 산출이 저조한 이유는 명확하다.
단기 성과 중심의 평가 체계로 인해 실패 가능성이 높은 혁신 기술에는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기술 이전과 상용화 과정에서는 관료적 의사결정이 개입된다.
한국의 AI 투자가 '양'은 늘었지만 '질'은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데이터 규제 지수의 벽
AI의 식량인 데이터를 활용하는 데 있어서 한국의 규제 환경은 개발자들에게 가장 높은 장벽으로 작용한다.
글로벌 법률기관이 발표한 'AI 데이터 활용 난이도 지수'에서 한국은 아시아 주요국 가운데 가장 높은 규제 강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의료·금융 분야에서는 가명·익명 처리된 데이터조차 활용과 국외 이전에 대한 법적 리스크가 커, 대규모 모델 학습에 필요한 양질의 데이터를 확보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다.
현장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 보고서를 작성하다 하루가 끝난다"는 말이 공공연하다.
# CEO·이사회 AI 이해도 격차
인재 이탈을 가속화하는 또 다른 요인은 '탑다운(Top-down) 방식'의 의사결정 구조다.
전통 제조업 기반의 국내 기업 이사회와 최고경영진의 AI·소프트웨어 이해도는 글로벌 빅테크에 비해 현저히 낮다.
국내 시가총액 상위 50개 기업 이사회 가운데 AI·SW 또는 딥테크 분야 전문 경력을 가진 이사의 비율은 평균 7.2%에 불과했다.
반면, 미국 나스닥 상위 50개 기업은 이 비율이 21%를 웃돈다.
이는 AI 조직이 기술적 비전보다 임원의 정치적 판단에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 실패 용인 지수의 부재
AI는 시행착오와 실패를 통해 진화하는 기술이지만, 국내 기업의 KPI 중심 문화는 이를 용인하지 않는다.
글로벌 컨설팅 자료에 따르면, AI 프로젝트에서 성공 이전의 실패를 '가치 있는 경험'으로 인정하는 비율은 북미 지역이 75% 수준인 반면, 한국은 35% 미만에 그친다.
실패가 곧 경력의 오점으로 남는 환경에서 개발자들은 도전적인 연구 대신 실패 가능성이 낮은 '안전한 과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데이터가 말해주는 결론은 분명하다. 대한민국 AI 인재들이 떠나는 이유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GPU 부족, 과도한 데이터 규제, 그리고 낮은 경영진의 AI 이해도는 최고급 인재들에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 환경'으로 인식된다.